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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최질의 난 김훈 최질 고려거란전쟁

by 나는 페파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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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포스터
출처: 디지털 KBS

 

김훈

 

고려 초기의 장수 김훈은 1010년에 거란의 대규모 침략에 맞서 통주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용감한 전투력으로 인해 상장군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014년, 중추원사 장연우와 중추원 일직 황보유의가 경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하려는 계획으로 인해 무신들 사이에 불평이 커졌습니다. 이에 김훈은 상장군 최질과 함께 병사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귀양으로 보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들은 무관으로 상참 이상을 모두 문관으로 겸하게 하였으며, 어사대를 금오대로, 삼사를 도정서로 개편하여 무관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1015년, 왕과 내통한 서경유수판관 이자림의 계략에 의해 김훈은 주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김훈과 최질의 무신 정권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초기의 무신과 문신 간 권력 투쟁의 한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최질

 

 

고려시대 초기의 무신 최질은 중랑장으로서 1010년에 발생한 거란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후 상장군의 지위에 오르지만, 그는 무신이기 때문에 문관의 지위를 가질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1014년, 최질은 김훈, 박성, 이협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왕궁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영업전을 백관의 녹봉으로 쓰기를 제안한 문신인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유배로 보냈으며, 왕을 협박하여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상참에게 문관의 업무를 겸하도록 하고, 어사대와 삼사를 금오대와 도정서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러나 1015년, 왕가도에 의해 최질과 그의 동료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문신 우대 정책에 반발한 무신들의 권력 투쟁이 실패로 끝난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시대 초기의 사회 정치 구조에서 무신과 문신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던 시기로, 이러한 갈등은 나중에 고려의 정치 체제를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김훈 최질의 난

 

 

고려 현종 시대에 두 무신, 김훈과 최질은 1010년에 거란의 침략에 대항하여 이들을 물리치며 상장군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란 침략 이후에 군대 증가에 따른 백관의 녹봉 부족 문제로 인해 경군의 영업전을 채워야 하는 정부의 결정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군인들에게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1014년에는 김훈과 최질이 박성, 이협, 최가정, 임맹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하였습니다. 이들은 백관의 녹봉을 영업전으로 채우려던 황보 유의와 장연우 등을 추방하며, 왕을 협박하여 이들을 귀양으로 보냈습니다.

 

이들은 또한 모든 상참에게 문신의 역할을 부여하고, 어사대와 삼사를 각각 금오대와 도정서로 개편하였습니다. 이 결과, 무관들이 문관의 역할을 겸하게 되어 정사를 마음대로 다스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의 기강이 약화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현종은 이자림의 계교를 따르게 되었고, 서경의 장락궁에서 잔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자림 등은 이 잔치에서 술에 취한 김훈, 최질, 이협, 최가정, 임맹 등 19명을 살해하였고, 이후에는 황보 유의와 장연우를 다시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무신들이 변경한 관직의 이름도 복구하였습니다.

 

이렇게 김훈과 최질의 난은 문신 우대와 무신 천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시작된 첫 번째 무신의 난으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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